연장전
메인 협업자의 최종 결과물 인도 후에도 할 일은 남아있다. 전달받은 최종 그래픽으로 내부 사정에 맞게, 실제 발주에 적합하게 데이터를 조절한다. 키 비주얼 사용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기준 서체, 컬러뿐만 아니라 이 매체에는 이렇게 저 매체에는 저렇게 적용해달라는 메시지를 포함한 기획자의 의도를 디자이너와 협업 부서에 전달한다. 여기까지 오면 또 제작을 담당하는 디자이너에게 차례가 넘어가므로 프로젝트는 또 한 번 나의 손을 떠난다. 실제 발주 파일을 확인하고, 샘플을 보면서 종이와 컬러를 테스트해보면서 머릿속에 있는 결과물의 모습과 최대한 일치시킨다.
대부분의 제작물의 경우 스튜디오에서 받은 키 그래픽을 그대로 사용하려고 노력해서 디자인 작업이 크게 힘들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복병은 다른 곳에 있었는데 그건 바로 쇼핑백. 스튜디오에서 여러 쇼핑백 시안을 제안해줬었는데 시안을 여러 개를 들고 가야 하다 보니 제안 시안 외에 다른 선택지가 필요해 내부에서 처리했었다. 그런데 하필 보고에서 내가 만든 시안이 채택되었고, 이때부터 고난의 시작이었다.
사진에서 보이듯 내 시안은 색지에 형압을 넣고 유광 먹박 로고 처리에 리본 끈 손잡이로 구성된 쇼핑백이었다. 그런데 이제 3가지 다른 색상과 사이즈를 곁들인. 일단 세 가지 컬러 종이 수급이 힘들었다. 쇼핑백으로 만들 수 있으며 형압 후가공이 유효한 그램 수를 갖춘 색지는 대부분 수입지고, 코로나 때문에 항공 사정이 좋지 않아 수입지가 국내에 오기 힘든 상황이었다. 국내에 몇 장 없다는 종이를 박박 긁어서 만들어달라고 사정해야만 했다. 수입지에 소량 제작 콤보로 단가도 보통 비싼 게 아니었다. 난 웬만하면 비용 조금 내더라도 그냥 진행하자고 말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내 생각에도 조금 비싸서 담당 부서에 많이 미안했다... (그래도 강렬한 첫인상을 위해 과감한 비용을 투자해줘서 감사하다. ) 종이 수급, 제작, 납품 일정 때문에 제작 부서 디자이너도 나도 심장 쫄깃해지는 시간을 몇 차례 보낼 수밖에 없었다.
종이 다음엔 리본이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종류의 리본 끈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우리나라에 구현하지 못할 컬러와 직조의 리본은 없지 않을까? 너무 많은 선택지가 날 괴롭게 했으나 팀 내에 선호도 투표 도움을 받아 지금의 검정 리본 끈을 쇼핑백에 달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많은 산 넘어 산들이 있었다. 마감 시간은 다가오고 결정은 늦어지는 가운데 선택되지 못한 아이디어도 안타까웠고 그 와중에 '내가 좀 더 강하게 주장해서 관철했어야 하는 걸까'라는 의심과 선택 과정에서 놓친 것들에 대해 아쉬움까지 끌어안고 출고일 까지 계속 달렸다.
PM으로서 흔들리지 않고 의견을 갖고 마지막까지 간 점은 윗사람들은 싫었겠으나 협업자들은 어쩌면, 아마도, 다행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윗선의 의견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바꿔주세요. 수정해주세요. 다시해주세요 를 반복했었다면 절대 마감일에 맞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치만 상대방 얘기도 들어봐야겠지..?)
피날레
아무리 힘들고 촉박한 프로젝트라도 끝은 있기 마련이다. 어떻게든 가오픈일인 2월 24일에 맞춰서 대부분 설치가 완료되었다. 막상 오픈하고 나서는 설치가 원하는 대로 잘 됐는지 확인하고 갑자기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느라 사람들의 반응을 접하기 쉽지 않았는데, 1년 가까이 지나고 나서야 생각보다 다양한 반응들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중 신기했던 점은 사람들이 플로어 가이드를 하나씩 챙겼고 그걸 들고 사진을 찍어서 소셜 미디어에 해시태그랑 같이 올렸다는 점이었다. 브랜드와 자발적으로 소통하는 사용자의 모습을 직접 목도하게 되니 신기하고 재밌었다. 당초 3개월 정도만 그래픽을 유지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길게 유지되면서 오픈 초반의 시그니처 룩으로 비주얼이 사용된 것 같아 나름의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던 프로젝트다. 앞으로 인생에서 신규 백화점 오픈에 관여하고 또 이렇게 건물에 그래픽을 크게 적용할 기회가 또 있을까? 이제 2021년을 떠올릴 때면 더 현대 서울 프로젝트로 많이 기억 남을 것 같다.
프로젝트 크레딧
프로젝트 디렉터 : 정의정
기획 & 매니지먼트 : 한경희
아트 디렉션 & 디자인 : 홍은주, 김형재
애플리케이션 디자인 : 한경희, 변우석
디자인 제작 도움 : 플라이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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