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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일기/연말결산

3. 친환경 과일 캐리어 - 전반부

 

백화점은 프리미엄 과일을 선물하기 좋은 곳이다. 흔히들 많이 찾는 선물용 과일 바구니의 특징은 선물하는 사람의 사랑과 정성만큼 바구니 위로 한껏 과일이 솟아야 하는 게 포인트다. 그런데 알록달록한 제철 과일들은 모이면 생각보다 무거워 선물용처럼 담으면 20kg은 쉽게 넘어 사람이 손으로 들고 운반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늘 바구니들은 과일을 튼튼하게 받쳐줘 운반에 걱정 없는 라탄 소재로 짜인 피크닉 가방 스타일의 바구니들을 사용한다. 손잡이에 리본을 매어서 멋 부리기도 좋은 건 덤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과일 바구니를 분리배출이 가능한 소재로 바꾸라는 미션이 떨어졌다. 이런 바구니를 주의 깊게 보지 않아 별생각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재활용도 안 되고 일반 쓰레기로도 버리기 어려운 소재였다. 아마 라탄 사이에 철사 같은 걸로 고정도 하고 크기도 크다 보니 사용 후 처리가 어려웠을 것 같다. 그리하여 과일 바구니는 회사의 ESG 경영 차원에서 개선 대상이 되었다.

 

평생을 (약 8년간) 그래픽 디자이너로만 일한 내가 갑자기 제품 디자인의 영역을 생각하려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조금 어려웠다. 누구에게 어떻게 의뢰해야 하는지, 예산은 얼마로 생각해야 할지? 기간이 얼마나 필요할지?? 조금 막막한 가운데 우선 실현 가능한 형태와 소재를 기준으로 레퍼런스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래픽에도 능하고 제작 경험도 풍부한 다재다능 디자인 스튜디오 프래그가 떠올랐다. 다른 협업 후보도 있었지만 프래그라면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같은 배경을 공유하고 있기에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줄 것 같은 이상한 희망이 있었다. 그래서 서둘러 연락 후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형태 레퍼런스가 비교적 명확하게 있었고, ‘친환경’ 소재여야 한다는 점에서 제약사항이 많았단 프로젝트였다. 그 좁은 선택지 안에서 프래그가 깔끔하게 디자인과 소재를 제안해주었고 프로덕트를 다뤘던 경험으로 내가 파악하기 어려웠던 부분까지 꼼꼼하게 챙겨주었다. 여기서 나는 오로지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디자인 받으면 보고 문서 만들어서 보고하는 역할을 주로 담당했었다.

 

이런저런 시도 끝에 최종 디자인은 넓고 얕은 타원 형태로 양쪽에 손잡이가 달려서 과일을 운반하고 다른 용도로 재사용할 수 있는 형태가 선정되었다. 곡선으로 이루어진 옆면은 과일들이 손상되지 않고 남는 공간 없이 상품을 꽉 채워 넣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제일 중요한 점은 라탄을 종이로 대체하면서 종이로 분리배출을 가능케 해 재활용 확률을 높인 것이다. 견고함을 확보하기 위해 가죽과 비슷한 느낌의 종이를 사용했는데 이 종이는 청바지 택에도 사용되는 만큼 질겨서 무거운 과일도 잘 지탱할 수 있고 생활 방수도 된다. 리뉴얼된 바구니는 고객의 재사용을 유도해 폐기율 감소를 장려한 점과 종이 사용으로 인해 재활용 확률을 높이면서 친환경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제품 컬러에 대해서도 별도 인쇄 없이 원래 종이가 가진 크라프트 색상과 버건디 색을 활용할 수 있었는데 이 색상들이 ‘자연’에 가까운 느낌을 주고 기존 라탄과도 비슷해서 괜찮았다. 인쇄 절차를 없애면서 인쇄로 인한 환경 오염을 줄이는 데 조금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캐리어 손잡이 색상 옵션과 스몰, 라지 두 가지 크기 옵션을 두어 고객이 취향과 목적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사진 (c) 현대백화점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손잡이를 어떻게 다는지에 따라 무게 중심이 바뀌는지와 같은 실제 상품을 만드는 것에 대한 어려움과 생각보다 복잡한 과일 바구니의 세계, 친환경 종이라고 불리는 것들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사실 '종이 사용은 정말 친환경일까?', '바구니에 사용된 직조 라벨과 실 때문에 분리배출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같은 의문점이 남아 있긴 하다. 그 외에도 프로젝트 진행하면서 어려웠던 점도 있었는데.. 다 지났으니까 잊는걸루..

 

이 바구니는 더현대 서울 오픈에 맞춰 런칭하기로 해서 이름도 일부러 친환경 과일 '캐리어'라는 단어를 사용해 기존의 바구니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했다. 과일 선물 코너 대표 이미지 컷에도 소품으로 넣고, 코너 쇼케이스에 디스플레이로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라탄 바구니를 전면 대체하기를 희망했으나 현실적인 문제로 일부만 사용되고 있는데 그 점은 조금 아쉬웠다. 여담이지만 한참 지나서 동종업계 다른 매장에 갔는데 우리가 개발한 캐리어와 90% 흡사한 형태와 같은 소재로 만들어진 바구니를 진열하고 ‘친환경 바구니’라고 광고하고 있어서 깜짝 놀랐었다. 특허 등록을 했었어야 했나...

 

이 업무에 내가 직접 디자인으로 참여한 것도 아닌데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올해 디자인팀에서 국내외 디자인 어워드에 몇 가지 프로젝트를 출품했었는데, 그중 이 친환경 바구니를 국내 어워드인 ‘우수디자인(GD)상품선정’에 냈었고 최종적으로 특허청장상(a.k.a 동상)을 받게 되었다. 사실 기대하지 않았는데 큰 상을 받게 되어서 (회사 이름이지만) 기뻤고, 흔치 않은 경험이라고 생각해 과정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후반부에서 계속>>>